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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린 문학106

이슬 이슬 문제완 추운 밤 꼬박 새우고 이렇게 맞은 새벽 어둠을 밀쳐가며 끙끙 앓으면서도 손 한번 내리지 않고 들어 올린 나뭇잎 2022. 12. 28.
찻물 익는 밤 찻물 익는 밤 문제완 달빛 어린 샘물 길어 찻물로 올립니다 옹이진 마음 자락 그도 함께 올립니다 몸 여는 찻잎을 따라 닫힌 눈을 뜹니다 찻잔 가득 찰랑이는 말 못할 그리움이, 저녁 답 그 빛깔로 수런대는 그 잔향이, 붉어진 달그림자로 깊어지는 산 빛이, 2022. 12. 28.
우수雨水, 아침 우수雨水, 아침 문제완 그림자 따라 돌다 귀가하는 해거름이 잦아진 바람결에 별 몇 점 부르는 몸짓 저녁놀 머물던 온기, 마루 쪽에 스며있다 지난겨울 빙화들이 흰 새벽을 몰고 와서 무채색 수묵화 한 점 부려놓고 떠났는가 처마 밑 은유의 공간 조용한 휴식이다 산자락을 끌어내린 계곡물이 수런대고 텃새들 새물새물 몰려왔다 몰려가고 못 다한 노래를 찾는가 목젖만 간지럽다 2022. 12. 28.
연일 낚시 연일 낚시 문제완 문고리 자물쇠가 족쇄처럼 잠겨있는 간판만이 덩그렇게 옛 장터를 찍고 있다 거미줄 걸린 유리창 흑백사진 한 장이다 너도나도 모여들던 정겹던 낚시가게 낚싯대 품어 안고 파도는 잠이 들었나 추억을 인화하는 듯 고요해진 저 바다 흙담 옆 폐문 속에 세월만을 낚아둔 채 바람은 그 곁에 와 갈매기가 되었다 진열대 뒹구는 찌가 월척 꿈을 꾸고 있다 2022. 12. 28.
여름 낮달 여름 낮달 문제완 오지게 익어가는 저 뙤약볕 오이 좀 봐 구리 빛 얼굴에는 땀줄기가 샛강을 내고 울 엄마 한 평생만한 남새밭을 매고 있다 고향 떠난 자식 걱정 모래밥이 뭉클하다 부뚜막 언저리엔 늘 챙겨둔 밥 한 그릇 고샅길 끝날 때 까지 목이 한 뼘 길어지고 파출부 일당으로 연명하는 막내딸이 동구 밖 낮게 떠서 핼쑥하게 내려본다 비루한 생의 허리가 꼭 너만큼 휘었다 2022. 12. 28.
새벽 길 새벽 길 문제완 숨비 소리 배어있는 가풀막 등산로에 서녘에 상현달이 숲 속에 내려앉아 휘휘한 어둠을 제치고 길을 하나 닦고 있다 이제 봄이 오시려나. 엿듣는 바람소리 졸참나무 잎 새 한 장 기지개로 몸을 풀고 미명에 붉어지는 하늘, 동녘이 눈을 뜬다 2022. 12. 28.
봄날 들꽃 봄날 들꽃 문제완 무서리 흠뻑 내린 무등산 지난겨울 깡마른 가지마다 눈보라 흩뿌려도 고드름 달린 바위 틈 꽃씨 몇 점 숨었다 오시는 샛바람에 촉촉해진 봄기운이 부드럽게 흙을 감싸 한 밤을 꼬박 새우자 부스스 기지개 켜며 아침 이슬 받는다 더디 깬 꽃잠에도 꽃대를 밀어올려 금낭화는 수줍은 듯, 돌단풍은 숨은 채로 꽃 얼굴 햇살에 내밀고 재재재, 말을 건다 2022. 12. 28.
바지랑대 가을 바지랑대 가을 문제완 고달픈 땀방울인가, 높이 올린 바지랑대 텅 빈 가을하늘 오롯이 받쳐 들고 바람에 제 몸을 내놓고 두어 번씩 흔들린다 씨줄날줄 엮여있던 허리춤 흙먼지도 비벼대는 몸짓 따라 땟물로 풀려나고 어설피 옷섶을 돌아 헹굼 물에 감긴다 하얀 뒤태 하나로도 주름살 펴지는 대낮 매듭진 앙금들이 가을빛에 녹아들어 팽팽히 당겨진 줄에 저 먼저 내걸린다 뭉게구름 사이사이 바지가 펄럭일 때 수없이 절망하던 어제 일을 널어 말리면 지나던 여우비도 놀라 햇살 뒤에 숨는다 2022. 12. 28.
겨울 산, 몸살 겨울 산, 몸살 문제완 수북이 낙엽 쌓인 분적산 가풀막엔 깊어가는 시름에 계절이 미끄러진다 그 한때 꽃몸살 앓던 열기마저 사뤄내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넘나들던 소소리 바람 하늘 길도 까무룩히 호흡이 가빠지고 온 산에 채찍을 치는, 팽이처럼 빙빙 도는 내 몸도 꽃이 핀다, 겨우내 붉은 열꽃 결 고은 바람 따라 빗금 치는 가랑잎 소리 그 무슨 못 다한 말씀을 깨우치려 하시는가 2022. 12. 28.
가창오리 가창오리 문제완 겨울 동림지*에 살얼음 베어 물고 가창오리 무리지어 칼등에 늘어섰다 점점이 늘어선 점자, 한 세상을 읽는다 저들도 부호를 아는지 날개 마다 여는 괄호 하늘 높이 비상의 꿈 사랑표를 그려가며 소실점, 슬픔의 역류를 가만히 부려놓는다 * 전북 고창군 성내면 소재, 가창오리 겨울 서식지 2022. 12. 28.
국수 한 그릇 국수 한 그릇 문제완 순천역 매점에서 옛 친구를 만났다 어느덧 정수리께 진눈깨비 지나가고 덜커덩 철로를 따라 젊은 날도 지나가고 더운 국물 한 사발에 반쯤은 녹인 허기 휘어져 낭창낭창 국수 가락 같은 말이 어둠을 끌어 올리듯 한 세월을 받쳐 든다 삼등칸 옆자리에서 마주친 얼굴 같은 우리 한때 젊은 날의 뜨겁던 그 열기가 한 그릇 막국수를 건너 시나브로 헤식었다 2022. 12. 13.
우체통이 보인다 우체통이 보인다 문제완 길모퉁이 돌아가면 서있는 빨간 우체통 혼자서 하루 종일 늦가을 비를 맞는다 따스한 안부 한 장을 받아본 지 얼마일까 메일과 카카오톡 넘치는 요즘세상 우표붙인 편지 들고 그 누가 오련마는 오늘은 빗줄기를 세며 가슴을 비워둔다 살아 온 나이만큼 너 또한 세월을 이고 반쯤은 희미하게 웃어도 주는 구나 그리워 성긴 시간 속 숨어들어 망을 본다 고요가 깔려있는 단칸방 하나 얻어 그럭저럭 철도 들며 너와 함께 건넌 시간 바람이 지나 가는지 휘파람 소리를 낸다 2022. 12. 13.